생명과 기계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에
[1] 알파고 충격과 이세돌의 선물
» 출처 / https://youtu.be/7Pq-S557XQU
“나, 그냥 캄보디아 오지 같은 데 가서 농사나 지으며 살까?”
연이어 승리하는 알파고를 보며 친구에게 했던 말이다. 불안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기술 문명이 들어오는 속도가 더딜 오지로 도망가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학교에 강연을 하러 왔던 구글 딥마인드의 최고경영자(CEO) 데미스 하사비스는 궁극적으로는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는 과학자, 또는 과학 연구를 수행하는 인공지능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 난 뭐 해먹고 살라고!
미래의 어느 순간을 상상할 필요조차도 없다.[1] 미국은 자동화로 제조업 일자리의 11퍼센트를 잃었고, 중국조차 공장 노동자 1600만 명을 해고했지만 로봇 덕분에 생산성이 오히려 증가했다. 무인 운송 시스템이 도입되는 물류 산업, 자동 판매기가 늘어나고 있는 소매업, 자동화와 인공지능이 침투하고 있는 각종 사무직 분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반면, 로봇 판매량은 2011년 미국과 유럽연합에서 43퍼센트 증가했다.[1] 법률문서를 분석해 주는 인공지능 소프트웨어인 이디스커버리(eDiscovery)는 변호사 500명 분의 일을 더 정확하게 할 수 있으며, 이미 신문 기사가 인공지능에 의해 작성되고 있다. 의료 수술이 로봇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으며, 아이비엠(IBM)의 왓슨과 같은 인공지능은 곧 의료 진단의 영역까지 침투할 예정이다.
낯설고 난감한 대상, 인공지능 로봇
나를 괴롭힌 것은 밥그릇 걱정만이 아니었다. 일상의 곳곳에서 마주칠 인공지능 로봇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우리는 사람과 동물의 행동에 대한 경험적, 진화적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고, 이에 기반하여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고 대응한다. 따라서 사람이 실수를 하거나 공격해 올 때는 표정과 행동 패턴을 통해 대비할 수 있다.
예컨대, 복잡한 도로에서 차선을 바꾸거나 신호등이 없는 삼거리를 지날 때, 우리는 다른 차가 양보를 해줄지 말지를 순간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성질 급하게 밀고 들어가다가 사고를 내기도 하지만 대부분 찰나의 눈치로 안전하게 지나간다. 또 어떤 사람이 만취한듯이 비틀거리거나 모자를 눌러쓰고 눈치를 보며 접근할 때, 우리는 어느 정도 머리를 굴릴 수 있다.
하지만 자율주행차나 로봇에 대해서는? 자율운전을 하는 자동차가 실수를 한다면 그건 어떤 종류의 실수일까? 얼마 전 구글에서 나온 자율주행차가 모래주머니를 피해 크게 우회전 하다가, 시속 24km 정도로 이동 중이던 버스와 추돌하는 사고가 있었다.[4] 구글은 최초로 사고 책임을 일부 인정했다. 모래주머니를 피해 여러 사람이 타고 있는 버스를 들이받는 이 ‘인간적’이지 못한 실수는, ‘자율주행차가 다수의 안전과 운전자의 안전 중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와 같은 윤리적 논란을 일으켰다.
얼마 전 국내에서도 일부 도로에서의 자율운행이 허가되었고,[5] 머잖아 구글, 현대, 도요타 등 여러 회사에서 나온 온갖 종류의 자율주행차들이 도로에 쏟아져 나올 것이다.[6] 그럼에도 자율주행자와 운전자, 보행자의 상호작용에 대한 정보는 너무나 부족하다. 치열한 눈치 싸움이 오가는 도로에서 내 차가 무리해서 지나려 할 때, 자율주행차는 사람처럼 눈치채 줄까? 자율주행차의 움직임을 내가 눈치챌 수는 있을까? 위 사고에서 구글의 자율주행차와 버스 운전기사는 대단히 느린 속도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를 둘 다 하지 못했다.
어떤 전자 장비도 예외일 수 없으며, 사물인터넷 시대에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될 해킹은 또 어떤가? 철벽 보안이어야 할 은행도 뚫리는 마당에, 해킹이나 악성 소프트웨어로 인한 오작동, 납치가 문제시 되지는 않을까? 그럴 때 차 안팎의 사람은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동일한 문제들이 최근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로봇에도 적용된다. 얼마 전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나온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Atlas, [7] 아래 동영상)는 사람처럼 걷고, 문을 여닫고, 물건을 나를 수 있다. 이 로봇들이 강아지처럼 사람과 함께 산책하며, 사무실이나 거리를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어쩐지 무서워졌다. 하물며 이들에게는 “죽음”이 없다. 모든 인간과 생명체에게 강력하게 작동하는 “죽음”이 이들에게는 무의미하다. 나는 1초 뒤에 이 로봇이 어떻게 움직일지 표정을 보고 예측할 수도 없고([8] 동영상), 로봇을 죽일 수도 없다. 오로지 나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아니, 죽음조차 재정의 될지도 모르겠다. 인공의수(프로스테틱스; prosthetics, [9] 동영상),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uman-Computer Interaction), 유전공학, 인공지능, 로봇공학의 발전은 생명과 기계의 경계를 점점 더 흐리게 만들고 있다. 종국에는 기계가 인간 종을 대체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까지 나오는 판이다. 일부에서는 뇌를 다른 몸에 이식하려는 시도도 일어나고 있다.[10]. 나는 도대체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인가?
과거로 돌아갈 순 없지 않은가
불안에 떨던 내가 고개를 들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질문과 한 사람의 그릇 덕분이었다. 알파고에 대해 논의하는 한 세미나에서 연사님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기술이 지금보다 못했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가?”
글쎄…. 예전엔 어땠더라? 초등학교 때 배운 것처럼 시속 300km로 달리는 케이티엑스(KTX)와 핸드폰이 여가 시간을 늘려준 것인지는 도통 모르겠다. 퇴근 후와 주말에도 회사에서 카톡과 이메일이 날아온다는 하소연과 잦은 출장 얘기는 들어봤다만…. 익숙해진 지금이야 컴퓨터와 핸드폰 없이 어찌 살았나 싶지만, 모두에게 없던 시절에는 없던 대로 별 문제 없었다. 통일호 타고 다녀도, 편지를 며칠씩 기다려도, 제법 괜찮은 삶이었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이 바꾼 게 그뿐이던가? 또 뭐가 있지? 생각하다가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지금보다 더 인종을 차별하고, 남녀를 차별하고, 대다수 일반인에게는 선거권조차 없던 시절로는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뉴스를 종이 신문으로 보느냐 아이패드로 보느냐는 어찌보면 사소한 문제다. 진짜 중요한 것은 과학과 기술을 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였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세계관과 인권의식, 사회제도의 변화와 항상 함께 일어났다.
» 저서 <통치론>에서 자유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입각한 의회 민주주의를 제안했던 정치사상가 존 로크는 자신을 “뉴턴의 하수인”이라고 불렀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17세기 유럽의 과학혁명은 유럽인들이 세상을 보는 방법을 크게 변화시켰다.[2] 뉴턴 물리에 따르면, 불확실한 것은 없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까지 예측할 수 있었다. 뉴턴 물리 덕분에 유럽인들은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무지를 극복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계몽 운동이 일어나고 절대왕정에 도전하는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입헌군주제가 영국에서 가장 먼저 채택된 것도 뉴턴 과학을 통하여 낡은 중세구조를 비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과학과 기술에 의한 사회 변혁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은 가사노동의 부담을 줄여 여성의 사회진출을 도와주었다. 여성들이 돈을 벌게 되면서 서양에서도 남녀차별이 점차 약화되어 갔다.[11](동영상). 온라인 공개수업(MOOC; Massive open online course)을 비롯한 방대한 온라인 자료들은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 정보의 독점을 완화하고 있다.[1] 공중파 방송과 라디오가 소수의 목소리만을 전달할 수 있는 반면, 아프리카 티비, 팟캐스트, 블로그, 트위터 등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방송할 수 있게 해준다.직접 민주주의를 위한 온라인 플랫폼도 세계 각지에서 실험되고 있다.[12] 이러니 내가 과거로 돌아가고 싶겠는가!
‘이세돌의 선물’
그러고도 남아 있던 불안감은 “인간이 아닌 이세돌이 진 것이다”라는 이세돌의 한마디에 쓸려나갔다. 대단히 겸손한 모습인 동시에, 인간이 기계에 졌다며 혹은 두려워하고, 혹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하는 말로 들렸다. 사실, 경기를 보던 이들 중 그 누구도 이세돌만큼 타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생을 걸었던 바둑에서 스스로 시인할 만큼의 압박을 받고 있었고, 연이은 패배에 엄청난 혼란과 환호와 두려움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배려해 준 사람됨을 보니 고마움과 함께 여유가 생겼다.
» 이세돌 9단이 3월13일 오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제4국을 마친 뒤 밝은 표정으로 소감을 말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김명진 기자
인공지능을 둘러싼 혼란과 불안들이 오히려 반가워졌다. 과학과 기술의 의의에 대해 국민적 관심이 이토록 집중된 적이 있었던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대단히 시의적절하게도, ‘우리에게 과학이 무엇이고, 이걸로 뭘 할 것인가’를 성찰해볼 기회를 맞이한 건 아닐까? 한국에서 알파고와 이세돌의 경기를 치르지 않았더라면 오지 않았을 소중한 기회.
» 요즘은 1000원이면 살 수 있는 온도계. 0점을 어디로 정하고 1도를 얼마로 정할 것인가와 같은 기본적인 것조차 오랜 논의와 혼란을 거쳐서 만들어졌다.[8]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Temperature서구인들이 오늘과 같은 모습의 과학을 만들기까지는 무려 수백 년이 걸렸다.[13][14][15]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고 측정하는 과학 연구의 방법론이 오랜 시간, 여러 사람에 걸쳐서 다듬어졌고, 수학과 통계를 활용하는 방식(및 수학과 통계 그 자체)[16], 학분 분야의 구축, 협력연구 요령 등도 수백여 년 간 온갖 사건을 겪으며 만들어냈다. 우리나라 대학의 이공계열 학과들은 이런 수백여 년의 시간을 걸쳐서 분지하고 생겨난 것들이다.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갈릴레오,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등이 일으키는 센세이션을 이세돌-알파고의 격돌만큼 가까이서 보며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하고 감각을 다질 수백 년의 시간이 있었다. 서구인들은 과학이 가져다 준 편의, 경제성장과 군사력 만큼이나 실험실 안전사고, 연구윤리, 사이비과학, 연구 성과의 성급한 남용, 과학 연구가 사회에 일으킨 크고작은 변화들을 절절하게 겪어왔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과학이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에 가깝다. 그것도 대포 쏘아대는 제국주의와 함께.[2] 사회진화론의 옷을 입고 군대와 함께 밀어닥친 과학 기술의 충격은 실로 엄청나서, 이웃 중국에서는 대약진운동, 문화혁명과 같은 무지막지한 실험을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충격을 소화해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제국주의는 피식민지를 멸시하고 수탈하였는데, 일제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의 상황 또한 서양 열강의 식민지들과 다르지 않았다. 분단에 전쟁까지 잇달았으니 상황은 더욱 어려웠다.
기적 같은 속도로 따라잡아 서구와 비슷한 과학적 성과를 내는 수준에 이르긴 했지만, 우리에게 과학은 여전히 남의 학문이다. 황우석 사태, “세계 최초”, “원천 기술”에서 보여지듯, 과학이란 '이전처럼 호되게 당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잘 먹고 잘 살려면 꼭 필요한 부국강병과 경제성장의 절대적 수단'이라는 막연한 인식이 흩어져있을 뿐이다.[17] 요컨대 서구 국가들과 우리나라는,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내공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없이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를 넘어 선도자 (first mover)가 되기 어렵다. 선도자는 남이 만들지 않은 기준을 스스로 확립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융합 연구가 중요할 때는 어려움이 따른다. 학문의 분류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분류 방식 자체가 대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린네가 시작한 생물 분류법은 생명에 대한 이해가 진전됨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 왔고, 학자들의 관점에 따라서도 조금씩 다르다. 서양 사람들은 스스로 일궈낸 과학 분류다 보니 비교적 자유롭게 넘나드는듯 하다. 알파고를 만든 하사비스도 컴퓨터공학과 인지신경과학 등 몇개 분야를 넘나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서구인들이 분류해 놓은 결과만 따오다 보니 융합조차도 남이 이미 섞어놓은 것을 그대로 따오는 경향이 있다. 아직 우리 스타일로 분류하고 섞고 넘나드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인공지능, 통신, 생물학, 로봇공학 등 온갖 분야의 융합이 일어나는 지금, 자기만의 스타일로 섞고 넘나드는 능력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과학이 무엇이며 우리는 이것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한 논의는 과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과학의 안전한 사용에도 도움을 준다.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을 활용한 거짓말 탐지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것이 법정에서 악용될 여지에 대해 사회 각계에서 활발한 논의를 벌였다. 여러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학회와 학술지가 생기고 세미나가 열렸으며, 법조인들을 대상으로 워크숍이 열리고 교육자료가 배포되었다. 그 결과, 얼마 전에는 뇌 영상기술이 두려워했던 만큼 악용되지는 않더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다.[18] 그러니 제대로 활용하기만 한다면,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을 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혼란은 대단히 유용하며, 또한 필요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앞으로 쓸 사이언스온 연재를 통해서 차근차근 보여주겠지만, 갈수록 생명과 기계의 경계는 흐려질 것이다. 뇌과학에서 영감을 얻은 심화학습(deep learning)뿐 아니라, 진화적 로봇공학(evolutionary robotics), 발달 로봇공학(developmental robotics)처럼 생명을 모방하는 로봇과 인공지능 기술이 생겨나고 있다. 역으로 유전공학을 사용하여 생명을 디자인하거나, 실험실에서 특정 장기를 만들어내듯이 생명을 기계처럼 디자인하고 생산해내는 기술도 발전하고 있다. 생명과 로봇을 연결하는 인공의수 기술 (prosthetics)도 나날이 향상되고 있다. 필연적으로 생명과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인적 자원”, “구조 조정”, “일중독”에서 비춰지듯이, 자본주의의 대두와 산업혁명 이후로 삶을 노동 생산성의 관점에서 대하는 경향은 강해졌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노동의 많은 부분을 대체하게 되면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색다른 고민이 시작될 것이다. 기후변화, 인터넷, 빈부격차에 힘입은 공유경제가 부상하고,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소유에 대한 관념,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인 노동에 대한 관념도 변화할 것이다.[1] 지난 시대에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탄생하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형태로 실현되었듯, 미래에도 새로운 개념들이 탄생하고 그에 따른 사회문화적 변화가 일어날 공산이 크다.
이런 변화들이 너무 거창해서 개인이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 사람의 영향은 작으면서도 작지 않아서, 남들 따라 묻어가는 것조차 이미 묻어가는 그 흐름에 힘을 보태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된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지구촌에서 힘을 보탤 남의 흐름들은 다양해졌고, 어느 흐름에 힘을 보탤까, 아니면 알리바바의 마윈처럼 내 흐름을 일으켜 볼까, 하는 것은 저마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달라질 터이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하는 가치 기준을 설정하는 일이야말로 인공지능이 결코 대신해줄 수 없는 영역이며,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이 많아질 미래를 대비하여 반드시 준비해야 할 영역이다.
과학은 소수 대가의 권위에 순종하기보다는 “진짜 그래?” 하는 질문을 던지고, 함께 나누는 집단적 노력을 통해 발전한다. 이런 특성은 전통적인 사회 조직들에 비해, 권위의 여부에 무관한 참여가 가능한 인터넷과 민주주의의 수평적 특성과 비슷하다. 이렇게 궁합이 맞아서인지 최근에는 과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고 과학 전문매체와 과학 행사도 많아졌다.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다양한 목소리가 분분하게 마련이고 정돈된 모습과도 거리가 멀어질 게다. 그렇지만 혹자는 불안해하고, 혹자는 흥분하는 논의의 과정이 좀 혼란스러워도 괜찮다. 2500여 년 전, 동서양 철학의 기틀을 세운 그리스와 중국의 제자백가들도 질서 정연하게 논의를 한 건 아니니까. 그러니 “제자(諸子: 여러 학자들) 백가(百家: 수많은 학파)”라 하질 않았겠나.
이왕에 선물을 받았으니 이걸 가지고 재미있게 잘 놀아볼까 한다. 다음 연재부터는 생명과 기계의 경계에 있는 기술들, 컴퓨터와는 다른 뇌의 특징들, 자유의지나 감정과 같은 인공지능과 뇌과학의 쟁점들을 다룰 계획이다.◑
[참고 자료]
[1] 제레미 리프킨, 한계 비용 제로 사회. 민음사 (2014).
[2] 정인경, 뉴턴의 무정한 사회, 돌베개 (2014).
[3] Human Need Not Apply https://www.youtube.com/watch?v=7Pq-S557XQU
[4] 구글 자율주행차 첫 사고...윤리문제 본격 제기된다. 중앙일보 (2016.3.1)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183914
[5] 주행자율 `제네시스 EQ900` 내달 첫 일반도로 달린다. (디지털타임스 2016.2.21)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16022202100151753001
[6] EQ900 구매 10명 중 8명 자율주행기술 패키지 선택. (연합뉴스 2016.3.14)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3/11/0200000000AKR20160311173000003.HTML
[7] Atlas, The Next Generation https://www.youtube.com/watch?v=rVlhMGQgDkY
[8] Fido vs Spot ? Animal vs Robot https://www.youtube.com/watch?v=S7nhygaGOmo
[9] Hugh Herr The new bionics that let us run, climb and dance (CUT)https://www.youtube.com/watch?v=Eue0jLtghCY
[10] ‘I’ll do the first human head transplant‘ The Guardian 2015.10.3https://www.theguardian.com/science/2015/oct/03/will-first-human-head-transplant-happen-in-2017
[11] 장하준 동영상_Thing 4 인터넷보다는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꿔놓았다!https://www.youtube.com/watch?v=pYb3U_1x724
[12] 듣도 보도 못한 정치 7화. 잠금해제, 엄지들의 힘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2053
[13]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까치글방 (2003).
[14] 장하석, 온도계의 철학, 동아시아 (2013).
[15] 장하석,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지식플러스 (2015).
[16] 데이비드 살스버그, 통계학의 피카소는 누구일까, 자유아카데미 (2011).
[17] 연세 과학기술과 사회 연구 포럼, 멋진 신세계와 판도라의 상자; 현대 과학 기술 낯설게 보기, 문학과지성사 (2009).
[18] AL Roskies et al. (2013) Neuroimages in court: less biasing than feared. Trends in Cognitive Sciences 17: 99-101.
■ 연재를 시작하며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그거 알아서 뭐에 쓴다고 알라 하고 다닌 걸까? 아태이론물리센터의 2014년 선정도서,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를 저술한 장회익 교수님은 “우리가 생명이 무엇인지를 일단 이해한다면,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생명을 이해하고, 생명이 자리한 세상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250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뇌과학과 인공지능에 대한 이번 연재를 통해서 나를 이해하고, 너를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고, 우리가 이런 존재일 때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아울러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를 불안해 하는 우리에게 과학이란 무엇이고, 이걸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따져볼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욕심이다. 막연한 대상은 두렵지만, 스스로 분명해진 다음에는 선택이 남을 뿐이니까.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출처 http://scienceon.hani.co.kr/?act=dispMediaContent&mid=media&search_target=title_content&search_keyword=%EC%82%AC%EB%AC%BC%EC%9D%B8%ED%84%B0%EB%84%B7&document_srl=386696
인공지능 대란(?) 이후로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가 희미에 지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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